스코틀랜드 고지대에서 시작된 마을 간 마라톤은 각 마을 대표들이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험준한 산길과 평원을 달리는 전통 경주로, 단순한 체력 경쟁을 넘어 마을 간의 연대와 명예를 건 대표 행사로 자리잡았다.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이 경기는 오늘날에도 고지대 축제의 하이라이트로서 계승되고 있다.
언덕과 안개 사이를 가르는 전통, 하일랜드 마라톤
스코틀랜드 고지대(Higherlands)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이다. 가파른 언덕과 수풀로 뒤덮인 초원, 안개가 자욱한 계곡 사이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과 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을 유지해왔다. 이런 하일랜드의 정체성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전통 중 하나가 바로 마을 간 마라톤(Village-to-Village Hill Run)이다. 이는 단순히 빨리 달리는 경주가 아니라, 마을의 명예를 걸고 세대를 이어온 유산이자, 지역 공동체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상징적 행사이다. 하일랜드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인근 마을 간 교류와 경쟁이 자주 있었는데, 축제나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이면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경기가 자연스럽게 열렸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마라톤 형태의 달리기였다. 이는 단순히 체력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산악 지형에서의 생존력, 지형 이해도, 방향 감각 등을 종합적으로 요구하는 경기였다. 특히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까지 이어지는 자연 경로를 따라 달리는 방식은 당시의 실제 이동 경로를 반영한 것으로, 생업과 놀이가 맞닿아 있던 당시의 문화를 잘 보여준다. 이 경기는 특별한 트랙이 없이 자연 지형 그대로를 활용하기 때문에, 날씨와 계절, 심지어 들소의 출몰 여부까지 변수로 작용했다. 참가자는 각 마을의 젊은 대표들로, 이름을 걸고 달리는 만큼 마을 사람들의 응원과 기대가 대단했다. 경쟁이라기보다 일종의 자부심과 소속감을 확인하는 의식에 가까웠으며, 경기 종료 후에는 음식을 나누고 전통 음악을 연주하며 축제를 이어갔다. 오늘날에는 보다 체계적인 축제 경기로 정비되어 있지만, 여전히 마을 간 마라톤은 ‘달리는 민속 문화’로 평가받으며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단지 스코틀랜드의 지방 경기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몸으로 기억하는 귀중한 기회인 셈이다.
경기의 구조, 전략, 그리고 마을의 명예
마을 간 마라톤의 기본 형식은 각 마을에서 선발된 1명 또는 3명의 대표 선수가 참여하여 인접 마을까지의 거리를 달리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5km에서 15km 사이의 코스가 사용되며, 일부 대회에서는 30km 이상의 장거리 경로가 설정되기도 한다. 경로는 전통적으로 가축 이동로, 목초지 길, 고대 통행로 등을 따라 구성되어 있어 단순한 도로 경주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진다. 코스 중에는 급경사 언덕, 진흙길, 울퉁불퉁한 바위길, 개울 건너기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GPS나 표지판에 의존하기보다는 지형에 대한 이해와 방향 감각이 더 중요하다. 실제로 전통 방식에서는 ‘지도를 보지 않고 경로를 기억하는 능력’이 필수였고, 마을 어르신들이 젊은 선수들에게 경로의 지형과 자연의 징후(이끼의 방향, 바람의 흐름 등)를 가르치기도 했다. 경기 전날에는 마을 회관에서 대표 선수 소개와 전략 논의가 진행되며, 이 자리에서 선수는 마을의 엠블럼이 새겨진 천 또는 패치를 착용하고 참가를 선언한다. 이 패치는 마치 중세 기사단의 깃발처럼 마을의 정체성과 명예를 상징하는 요소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절대 떨어뜨리거나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경기는 보통 새벽 또는 이른 아침에 시작되며, 출발 신호와 함께 모든 선수가 각자의 길을 따라 동시에 출발한다. 팀전에서는 선수 간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협력하거나, 특정 지점에서 바통을 넘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도착 마을에서는 음악과 북소리, 전통 피리 소리로 선수들을 환영하며, 가장 먼저 도착한 선수의 마을은 해당 연도 축제의 대표권과 행사 첫날의 무대권을 획득한다. 일부 대회에서는 남녀 혼성 경기나 세대별 구분 경기(청년부, 장년부, 노년부)도 운영되며, 특히 노년부 경기는 ‘인생을 달린 자들의 지혜’를 상징하며 큰 존경을 받는다. 또한 마라톤과 병행해 전통 복장 퍼레이드나, 지역 음식 장터, 음악 공연 등이 열려, 주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대형 축제로 발전하고 있다.
전통을 달리는 사람들, 문화와 땀의 가치
스코틀랜드의 마을 간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공동체가 함께 호흡하고, 뿌리 내린 땅의 가치를 체험하며,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문화적 실천이자 의례에 가깝다. 특히 고지대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이 경기는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마라톤을 통해 각 마을은 단지 경쟁자가 아닌 ‘고지대의 이웃’으로 다시금 연결되고, 공동의 기억과 유대를 되새기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지역 공동체의 건강한 정체성과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단순한 운동을 넘은 ‘문화적 참여’의 장이 되어준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지역 공동체의 해체가 심화되는 가운데,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이 마라톤 전통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것은 대규모 스타디움도, 최첨단 장비도 필요 없는, 몸과 땅이 연결된 문화의 재발견이다. 결국 마을 간 마라톤은 “함께 걷고, 함께 달리는 삶”을 상징한다. 출발선에 선 사람들은 마을의 응원을 등에 업고, 바람과 안개를 가르며 역사의 흔적 위를 달린다. 그리고 결승선에서 기다리는 건 단지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땀과 발자국이 엮어낸 하나의 문화 유산이다. 그것이 바로 스코틀랜드 고지대가 세대를 거쳐 지켜온, 단단하고도 따뜻한 달리기의 전통이다.